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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세계]/책

여자 없는 남자들이 말하지 않는 것 -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서평

by 지평(地平) 2014. 11. 5.

이미지 출처 : YES24

어느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자신이 그곳에 있음을 당신은 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은 하루키의 10번째 단편집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 ‘예스터데이’, ‘독립기관’, ‘셰에라자드’, ‘기노’, 사랑하는 잠자’, ‘여자 없는 남자들’ 모두 7편의 단편이 실려있고, 그 중 하나인 ‘여자 없는 남자들’을 단편집의 책 제목으로 삼았다.

책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이번 단편집은 여자를 상실한 남자들의 이야기다. 아내가 죽고 혼자 남겨진 남자, 유부녀와 사랑에 빠졌다가 버림받은 남자, 회사 동료와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집을 뛰쳐 나온 남자, 옛 연인의 자살 소식을 듣고 세상에서 두 번째로 고독해진 남자… 여자 없는 남자들이 상실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하루키에 공감하는 이유

<여자 없는 남자들>은 재미있다. 첫 부분에 등장하는 ’드라이브 마이 카’부터 마지막 ‘여자 없는 남자들’까지 단편 하나 하나의 소재가 흥미롭기도 하고, 이야기에 흡입력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하루키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여자 없는 남자들>의 단편들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 겪는 상실의 아픔을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바라에게 그 무엇보다 힘겨운 것은, 성행위 그 자체보다 오히려 그녀들과 친밀한 시간을 공유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현실에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시간, 그것이 여자들이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 ‘셰에라자드’ p213

여자를 상실한다는 것은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시간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 여자를 통해 구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무 살이던 시절을 돌아보면 떠오르는 것은 내가 외톨이고 고독했다는 것뿐이다. 나에게는 몸과 마음을 따스하게 해줄 연인도 없었고, 흉금을 터 놓고 대화할 친구도 없었다. 하루 하루 뭘 해야 좋을 지도 알지 못했고, 마음 속에 그리는 장래의 비전도 없었다.

- ‘예스터데이’ p112

연인을 잃어 버리는 상실의 경험은 인생에 있어 누구나 겪는 보편적 경험이지만, 개개인의 역사로 볼 때는 그 누구에게나 조금은 과장된 느낌으로 기억되는 특별한 사건이다. 하루키는 그 특별한 사건을 섬세하게 보여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상실의 체험을 다시 재연하게 하고, 잊고 살던 삶의 보편적 질문과 맞닥뜨리게 하는 것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은 모두 닯았다.

하루키는 여자의 상실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야기에 더 공감하기 쉽도록 이야기에 몇 가지 장치를 해두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다 보면 각 단편의 남자 주인공들이 모두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닮은꼴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상실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주인공 가후쿠는 아내가 4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아내는 병으로 죽는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가후쿠는 말했다. “내가 그녀를 적어도 중요한 일부를 -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거야. 그리고 그녀가 죽어버린 지금, 그건 아마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한 채 끝나겠지. 깊은 바다 밑에 가라앉은 작고 단단한 금고처럼.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했는지, 상실의 원인을 알지 못하기에 남자는 더욱 괴롭다.

‘독립기관’에서 남자는 여자가 왜 자기를 버리고 다른 젊은 남자와 살림을 차렸는지 이유를 모른다. ‘기노’에서 남자는 아내과 왜 회사 동료와 불륜을 저질렀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셰예라자드’에서 남자는 여자가 왜 자기를 찾아와 이야기를 해주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여자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아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

상실에 대처하지 않는다.

<여자 없는 남자들>의 남자들은 여자와의 관계에 있어 항상 수동적인 위치에 있다.

”그 여자분과는 얼마나 자주 만나죠?”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달라요. 남편의 스케쥴에 따라서. 그것도 나를 괴롭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남편이 장기출장을 갈 때는 며칠을 연달아 만나요. 아이는 친정에 맡기거나 베이비시터를 쓰죠. 하지만 남편이 국내에 있으면 몇 주일 씩 못보기도 해요. 그런 시기는 무척 힘듭니다. 이대로 그녀를 두 번 다시 못 보는게 아닐까 생각하면, 진부한 표현이라 죄송하지만, 몸이 둘로 갈라지는 것만 같아요.”


- ‘독립기관’ p144

하바라는 그날 밤, 아직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 셰에라자드를 생각했다. 그녀는 어쩌면 이대로 모습을 감출지도 모른다. 그는 그것을 염려했다. 결코 일어날 리 없는 일이 아니다. 셰에라자드와 그 사이에는 어떤 개인적인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연히 누군가에게서 주어진 관계이고, 그 누군가의 기분 하나로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관계였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가느다란 실 한 올로 가까스로 이러져 있을 뿐이다. 아마도 언젠가, 아니, 틀림없이 언젠가 그것은 끝을 고할 것이다.

- ‘셰에라자드’ p213

<여자 없는 남자들>의 남자들은 여자가 원할 때만 여자를 만날 수가 있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를 떠나도 아무런 대처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와 만나는 동안에도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다.

우리는 가해자보다는 피해자 쪽에 더 쉽게 공감한다. 하루키는 남자 주인공들을 이유도 모른채 상실에 맞닥뜨리고, 상실에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하는 피해자의 위치에 세워두었다. 그 남자들을 더 불쌍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그런데 이렇게 한 쪽을 피해자로 만들면 다른 쪽은 상대적으로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여자 없는 남자들’을 떠난 여자들은 억울하게도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말하지 않는 것

<여자 없는 남자들>의 남자들은 상실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자신이 느끼는 아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남자들이 상실을 경험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남자는 상실의 원인을 아내에게서 찾으려 한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잔 이유를 알아내려고, 아내와 같이 잠을 잔 남자와 같이 술을 마시고 친구처럼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과 아내의 관계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자신이 채워주지 못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찾아내려고 하지 않는다.

하루키는 여자 없는 남자들로 하여금 상실의 원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건 병같은 거예요. 가후쿠 씨. 생각한다고 어떻게 되는게 아니죠.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간 것도, 엄마가 나를 죽어라 들볶았던 것도, 모두 병이 한 짓이예요.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 봤자 별거 안 나와요. 혼자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꿀꺽 삼키고 그냥 살아가는 수 밖예요.”

- ‘드라이브 마이 카’ p59

그저 여자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일축한다. 생각해 봤자 소용이 없다고 포기하라고 말한다.

‘기노’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노는 아내가 왜 회사 동료와 불륜에 빠졌는지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내가 바에 찾아와 스스로 그 이유를 말해주고자 할 때에도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여자 없는 남자들은 상실의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유를 모른다. 상실의 이유를 찾지 않았으니까.

상실의 이유

하지만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 본다는건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그런걸 바란다면 자기가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만큼 분명하게 들여다 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루키도 소설 속의 캐릭터를 통해 위와 같이 답변을 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왠지 저 대답은 뭐라도 대답해야 할 것 같아 모범답안을 옮겨 놓은 것 같다. 하루키가 만든 여자 없는 남자들은 자기 내면을 응시하면서 상실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상실의 아픔을 곱씹을 뿐 자신의 그 무엇이 상실을 일으켰는지 이유를 찾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여자 없는 남자들은 왜 상실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나.
여자가 떠나기 전에 그녀들을 이미 남자 없는 여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관계에서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고,
상실의 전조가 있어도 여자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하바라는 그날 밤, 아직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 셰에라자드를 생각했다. 그녀는 어쩌면 이대로 모습을 감출지도 모른다. 그는 그것을 염려했다. 결코 일어날 리 없는 일이 아니다. 셰에라자드와 그 사이에는 어떤 개인적인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연히 누군가에게서 주어진 관계이고, 그 누군가의 기분 하나로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관계였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가느다란 실 한 올로 가까스로 이어져 있을 뿐이다. 아마도 언젠가, 아니, 틀림없이 언젠가 그것은 끝을 고할 것이다.

- ‘셰에라자드’ p213

하바라는 왜 셰에라자드와 그 어떤 개인적인 규칙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는가? 성형의과 의사는 왜 그 유부녀에게 자신을 선택해 달라고 먼저 요구하지 않았을까. 가후쿠는 다른 남자와 잔 이유를 아내에게 직접 묻지 않았나? 다른 남자와 자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왜 아내의 아픔에 더 공감해 주지 못했나? 스스로 관계를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았으면서, 상실에 대해 어쩔 수 없었던 피해자인척 이제와서 아프다고 하소연을 한다.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여자를 말하지 않는다.
여자로부터 받은 혜택과 그 상실을 이야기할 뿐,
마땅히 해야 했으나, 자신들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이 여자를 상실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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