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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이 빠뜨린 이야기를 채워준 작품, <연년세세>

by 지평(地平) 2020. 11. 15.

황정은 작가를 몰랐다. <연년세세>를 알라딘 서점에서 주문하면서 7만이 넘는 판매지수를 보고 알게 되었다. 인기 있는 작가구나. 황정은 작가가 왜 인기가 있는지 찾아보지는 않았는데, 책을 읽고 나서 한 가지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정말 잘 쓰는 사람이구나. <연년세세>는 네 편의 단편이 서로 연결되는 연작소설집이다. 한 편씩 읽어나가면서 정갈한 문체와 작가가 창조한 디테일한 세계에 감탄했다. 얼마나 공들여 쓴 작품인지가 단번에 느껴졌다.

<연년세세>는 '순자'라고 불렸던 이순일 가족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46년생 이순일과 그의 장녀 한영진, 차녀 한세진, 이순일의 이모 윤부경, 윤부경의 손녀인 제이미. 다섯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이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황정은은 이 다섯 명의 여자를 알고 싶어한다.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어한다.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하면 다른 소설들과 다른 점을 발견한다. 작가가 등장 인물을 소개할 때 누구의 딸, 아들이라고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한영진, 한세진, 제이미를 누구의 딸이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가족의 위계 관계에 속한 구성원이 아닌 한 사람의 독립적인 존재로서 등장 인물을 다루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보이는 것 같다. 처음에는 이름간의 관계가 쉽게 파악되지 않아 혼동스럽다. 그런데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오히려 그 사람이 가족의 안에서 어떤 위치에 처해있고, 그로 인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가 더 잘 보인다. 작가의 의도는 성공했다.

이순일은 40년대에 태어나 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에게 맡겨졌다. 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고,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느라 자신의 삶을 사는 건 생각하지도 못하고 살다가 할머니가 되었다. 자식이 고생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랬지만, 정작 아이들에게 어떤 것이 행복한 삶인지 몰랐다. 이순일이 가족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한영진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가계가 어려워지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통업체에 취직을 했다. 경제력을 잃은 부모를 대신해서 집안의 가장 역할을 했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살 수는 없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가족에 붙들어맨 어머니가 원망럽지만 이 말을 꺼내지는 못한다. 한세진은 대학교 때부터 집을 나가 살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이런저런 직장을 거쳐가며 연극 시나리오를 쓴다. 한영진은 제대로된 벌이를 하지 못하는 한세진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백화점에서 물건을 파는 자신의 일을 도우라고 말한다. 이순일, 한영진, 한세진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연년세세>를 읽으면서 <82년생 김지영>이 떠올랐다. <82년생 김지영>은 대한민국에서 결혼한 30대 여성이 겪는 삶을 그렸다. 많은 독자의 공감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로도 만들어 졌지만, 김지영 이외의 다른 여성들의 삶을 소외시켰다는 비판도 받았다. <연년세세>는 <82년생 김지영>이 빠뜨렸던 이야기를 채워준다. 이순일을 보면서는 내 어머니가 떠올랐고, 한영진과 한세진을 보면서 처형과 아내의 관계를 떠올렸다. 이 작품의 미덕은 화해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미아 한센뢰베는 '다가오는 것들'에서 로맨스와 화해에 관한 기대를,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시키는데, 그게 정말 좋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하미영이 옳다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그것이 나탈리를 향해 다가오니까.

다가오니까, 하고 하미영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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