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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세계]/책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다른 사람이 된다

by 지평(地平) 2021. 4. 26.

 

<자기 결정>에서 페터 비에리는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명확한 정체성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독서보다 좀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이야기를 직접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내면의 심연을 들여다 보고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거대한 내적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소설 한 편을 쓰고 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그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뜨거운 고름 같은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그녀는 눈을 부릅 뜬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소년이 온다> p102

 

한 강 작가에게 '소년이 왔을 때' 그는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이다. 소년을 생각하며 그의 내면은 사원이 되고 더 이상 다른 글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소년이 온다>는 그가 뜨거운 고름 같은 눈물을 닦지 않은 채 소년을 응시하며 쓴 작품이다. 이 소설은 80년 5월 광주에 있었던 소년과 소년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을 위한 사원의 불빛이면서 동시에 한 강 작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한 힘든 도전이었을 것 같다. 그는 과업을 훌륭하게 완수했다.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광주에서 무참히 스러진 영혼들이 못다 한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페터 비에리의 말처럼 한 강 작가는 이 작품을 쓰고 난 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이 작품을 쓰며 변화한 것에는 터럭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소년이 온다> 를 읽는 독자 역시 다른 사람이 된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의 가슴 속으로도 소년이 올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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