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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세계]/책

이 슬픔은 그 슬픔이 아니다. <슬픔이여 안녕>에 대한 오해

by 지평(地平) 2020. 11. 9.

독서의 즐거움 중 하나는 평소의 나라면 찾아서 읽지 않았을 책을 우연한 기회로 만나 읽었는데 그 책이 마음에 무척 들 때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 그랬다. 한승혜 작가의 서평 글쓰기 수업 과제 책이라 읽게 되었는데 간만에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수업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나는 <슬픔이여 안녕>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 3가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책을 읽지 않은 독자나 읽었어도 기억이 나지 않는 분들을 위해 먼저 이 작품의 줄거리를 소개하겠다. (이 작품을 나중에 읽을 생각이 있으면서, 줄거리를 미리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더 이상 읽지 맑고 돌아가길 바란다.)

 

<슬픔이여 안녕>의 줄거리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5명이다. 화자인 나(세실), 아버지 레몽, 아버지의 애인 엘자, 휴가지 별장으로 찾아오는 어머니의 옛 친구 안, 세실이 휴가지에서 만난 남자 친구 시릴. 이년 전 기숙학교에서 나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세실은 아버지의 애인인 엘자와 함께 지중해의 별장으로 여름 휴가를 보내러 간다. 셋이 휴가를 보내던 별장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옛 친구인 안이 찾아오면서 세 사람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안은 마흔 두 살로 엘자보다 나이가 많지만 아름다운 얼굴에 매력적이고 세련된 사람이었고, 세실의 아버지 레몽은 아직 잘 모르는 여자를 사귀고 싶은 욕망에 안에게 끌리게 된다.

어느 날 네 사람은 칸에 가서 저녁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카지노에 도착한 뒤 안과 레몽은 단둘이 사라지고, 세실은 안과 아버지가 차에 다정하게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다. 레몽의 마음이 안에게로 떠난 것을 안 엘자는 서글프게 울고 세 사람을 떠난다. 다음 날 안은 세실에게 아버지와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안은 아버지만 빼앗아 가려는 게 아니었다. 안은 세실과 아버지의 행복했던 삶을 경멸하는 말을 하고, 세실에게 휴양지에서 만난 남자친구 시릴을 더 이상 만나지 말라고 요구한다. 모범적인 학생으로 정체성을 바꾸라는 안에게 세실은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세실은 자기가 지금껏 누려오던 세상을 송두리째 빼앗으려는 안에 위협을 느끼고 안과 아버지의 결혼을 막을 계획을 세운다. 아버지의 질투심을 자극해 안을 배신하게 만들기 위해 엘자에게 시릴의 애인이 된 척 연기하면서 레몽과 마주치는 상황을 만들라고 시킨다. 레몽은 더 예뻐진 엘자와 계속 마주치면서 점점 마음이 흔들리고, 결국 세실의 계획대로 엘자를 다시 만난다. 그런데 레몽과 엘자가 숲에서 키스를 하는 장면을 공교롭게도 안이 목격하고, 배신감에 충격을 받은 안은 자신의 차를 몰고 떠나버린다. 그날 밤 별장의 전화벨이 울리고 안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1) 첫 번째 오해

이 작품에 대한 첫 번째 오해는 읽지 않은 사람들이 흔히 갖는 오해다.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제목 때문에 상실의 슬픔과 작별하는 내용으로 지레짐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동차의 소음만이 들려오는 새벽녘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때때로 내 기억이 나를 배신한다. 그해 여름과 그때의 추억이 고스란히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안, 안! 나는 어둠 속에서 아주 나직하게 아주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이름을 불러 그것을 맞으며 인사를 건넨다. 슬픔이여 안녕.

이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보면 '슬픔이여 안녕'이 슬픔과 작별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맞이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오해는 Bonjour Tristesse(안녕 슬픔)을 '슬픔이여 안녕' 이라 번역한 탓이 크다. 그래도 '안녕 슬픔' 보다는 '슬픔이여 안녕'이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으로는 더 멋있으니 이렇게 처음 번역한 사람을 용서해 주기로 하자.

2) 두 번째 오해

두 번째 오해는 읽지 않은 사람과 읽은 사람의 일부가 갖는 오해이다. 이 작품을 통속 소설로 생각한다. 읽지 않은 사람은 이 작품을 통속 소설로 생각하고 굳이 찾아서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읽은 사람 중에서도 흔한 연애 소설로 생각하고 이 소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슬픔이여 안녕>은 르 몽드가 선정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책 100권'에서 41위에 오른 책이다. 출간과 동시에 비평가상을 받으면서 작품성을 확인받았다. 당시 프랑스 문단의 중진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프랑스인의 정신적인 삶을 증언하는 동시에 문학적인 장점이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장강명 작가의 <책, 이게 뭐라고>를 보면 그가 <슬픔이여 안녕>을 재평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럼에도 <슬픔이여 안녕>을 다시 읽으면서 몇 번이나 '이게 이런 책이었나?' 하고 놀랐다. 60년도 전에 나온 소설인데 낡거나 고루한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전개가 아주 빨라서 줄거리를 다 아는데도 몰입됐다. 인물들의 어둡고 미묘한 심리를 날렵하게 잡아내는 솜씨도 인상적이었다.

(중략)

어떤 면에서는 <슬픔이여 안녕>이 <빙점>보다 더 운이 없었다. 주제도 묵직하게 들리지 않았고, 사강이라는 작가의 화제성이 너무 커서 작품이 받아야 할 관심을 앗아갔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슬픔이여 안녕>은 시간의 시험을 버틴 고전이다.

두 번을 읽고 난 지금, 장강명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슬픔이여 안녕>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3) 세 번째 오해

세 번째 오해는 이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며 가장 핵심적인 단어라 할 수 있는 '슬픔'에 대한 오해이다. 세실에게 찾아온 슬픔을 안을 죽게 만든 일에 대한 후회, 자책감, 미안함, 그리움에서 오는 슬픔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물론, 세실에게 찾아온 슬픔이 상실과 자책을 전혀 내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실이 마주하게 된 슬픔은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소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세계의 충돌을 다룬 작품이다.

세실과 아버지의 세계

  • 떠들썩하고 뭔가를 갈구하는 사람들과 어울림
  • 쾌락과 행복을 추구
  • 경박한 취향
  • 정절, 진지함, 약속 같은 개념을 거부
  • 빠르고 격렬하고 일시적인 사랑에 매료

안의 세계

  • 세련되고 지적이고 신중한 사람들과 사귐
  • 무절제를 혐오
  • 품위 없는 행동을 경멸
  • 주변에 무관심함
  • 지속적인 애정, 다정함, 그리움을 추구

안은 세실과 아버지의 세계를 경멸하고, 세실의 자아에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삶, 아버지의 삶은 그런 생각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안은 그것을 경멸함으로써 내게 상처를 주었다. 사람은 뭔가 대단한 가치에 목표를 둘 수도 있지만 경박한 가치에 집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안은 나를 생각이 있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게 잘못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갑자기 시급한 일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아버지의 결혼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터였다. 우리는 독립성을 잃게 되리라. 우리 세 사람의 삶이 눈앞에 떠올랐다. 안의 교양과 지성으로 갑자기 확실한 균형이 잡히는 삶, 내가 안에 대해 부러워했던 그런 삶.

세실의 내면에는 안의 세계를 부러워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공존했다. 하지만 안이 세실에게 시릴과 헤어지기를 요구하고 베그르송을 공부하는 모범적인 학생이 되길 요구하면서, 세실은 안과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베르그송의 책은 안이 강요하는 세계를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실은 베르그송 읽기를 거부한다.

그 생활에는 생각할 자유, 잘못 생각할 자유, 생각을 거의 하지 않을 자유, 스스로 내 삶을 선택하고 나를 나 자신으로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나는 점토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점토는 틀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위 문장이야말로 '슬픔이여 안녕'의 주제가 담겨 있으면서 세실이 마주하는 '슬픔'의 원인을 밝혀주는 핵심 문장이다. 세실은 안이 강요하는 세상, 틀에 들어가는 것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뒤엎어 존재 자체를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니까.

'슬픔이여 안녕' 에서의 슬픔은 안을 죽게 한 일을 후회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 아니다. 틀에 맞춰 살기를 바라는 세상과의 충돌에서 상대를 파멸시키더라도 자신을 지켜나가야만 하는 운명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슬픔이다.

속도에 대한 도취, 약물, 도박 중독, 화려한 사생활... 사강의 삶을 보면 세상의 틀에 맞추지 않고, 화해하지 않으려는 세실의 모습이 겹쳐진다. 사강은 <슬픔이여 안녕>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예견한 것이 아닐까. 1954년 한 대담에서 사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작가는 같은 작품을 쓰고 또 쓰는 것 같다. 다만 시선의 각도, 방법, 조명만이 다를 뿐."

<슬픔이여 안녕>이 뛰어난 작품인 것은 자아의 성장 과정에서 경험하는 경계의 생성과 충돌을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성공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슬픔이여 안녕>이 헤세의 <데미안>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경계를 인식하고 세상과 화해할 수 없음을 깨닫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슬픔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 슬픔을 감내하고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을 때 자기만의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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