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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세계]/마인드와칭

내 안의 상처 입은 아이와 만나기

by 지평(地平) 2012. 1. 19.


  최근에 내가 겪었던 일이다.

  회사에서 일 하는 중에 어떤 일로 인해 아내가 불만에 가득찬 문자를 내게 보냈다. 그냥 두면 일이 커질 것 같아 나는 회의 중에 아내를 자극시키지 않으면서 화를 달래야 했고, 문장 하나 하나를 신중하게 만들어 문자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아내가 보내는 문자에는 내 잘못을 탓하는 공격성이 담겨 있었고,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그 공격성에 내가 상처받은 만큼 내 마음 속에 울화가 쌓이고 있었다.

  퇴근 길 전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길, 내 머리 속은 어떻게 하면 집에 가서 아내와 대화로 이 문제를 잘 풀 수 있을까로 가득찼다. 그리고는 최근에 공부한대로 아내의 말을 일단 잘 들어주고 감정을 수용해 주면서 이야기를 해 나가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내 다짐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벌어졌다. 아내와 대화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하는 말에 가시가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새 내가 차마 생각하지 못한 만큼의 공격적인 말을 아내에게 퍼붓고 말았다. 내가 원래 하려고 했던 건 이런게 아니었는데, 내가 왜 이러지 하는 생각에 말을 하고 나서 나 스스로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내는 나의 가시 돋힌 말에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순간 너무나 미안해 졌다. 하지만 이미 뱉어 버린 말은 주어 담을 수 없는 법, 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나는 너무 괴로웠다. 

  그 일이 있고 다음날, 틱낫한 스님의 <화해, 내 안의 아이 치유하기>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틱낫한 스님은 '플럼빌리지'라는 수행공동체를 운영하시는데, 아래 글은 그곳에서 수행을 한 어떤 외국 분의 치유 경험담이다. 


사랑으로 대화하기
   

- 조앤 프라이데이


  어머니는 거의 1년 가까이 많이 편찮으셨다. 그 사이 여덟 번이나 입원을 했고, 입원과 입원 사이에는 전문 간호사가 돌보는 노인요양센터에 가 계셨다.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를 뵈러 노인요양센터에 간 적이 있다. 2차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아버지는 환경을 통제하는데 능해서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도록 조건을 잘 맞추어 놓는 분이셨다. 아버지는 성격이 엄청 꼼꼼했다.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해야 마음을 놓는 분이었다.
  무엇이든 잘 보살폈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돌보는 일도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고, 그 것을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이 상황을 아버지는 무척 힘들어하셨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되면 아버지는 더욱 통제하려고 애를 썼고, 그러는 사이 점점 참을성 없고 짜증과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어 갔다. 그것이 아버지의 습관 에너지였다.

  우리는 노인요양센터에 앉아 있었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짜증과 화를 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점점 어머니를 참아내지 못했다. 거기 앉아 있던 나는 내면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습관적으로 아버지에게 소리쳤을 것이다. "그만 좀 해요! 어머니도 어쩔 수 없잖아요." 하지만 나는 그리하는 대신 잠시 멈추고 숨을 쉬었다. 나는 그 방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나와 가족에게 더 많은 고통을 초래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했다. "잠시 산책 좀 하고 올게요." 나는 주차장으로 나가서 걷기 명상을 했다.

  나는 호흡을 알아차리며 걸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걸어 마음이 차분해졌을 때 내 안에 있던 울화를 초대했다. 그 울화와 함께 숨을 쉬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깊이 보았다. 과거의 어느 순간이 떠올랐다. 내가 세살이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화를 내면서 급하게 다그친 적이 있었다. 내가 지금 아버지에게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지금 여기에서 그런 격렬한 반응을 하고 있는 존재는 바로 그때 심하게 상처받은 세 살짜리 아이였다. 

  나는 그 세 살짜리 아이를 잘 보살폈다. 그 아이을 안아 주면서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보라고 했다. 당시 그 아이는 불과 세 살밖에 되지 않아서 그 일을 고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지만, 사실 아버지의 행동은 아버지의 불행에서 나온 일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아버지는 그 아이가 아닌 그 누구에게라도 그렇게밖에 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 아이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나니 나 자신이나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이 자비심으로 돌아섰다. 틱낫한 스님이 늘 가르치신 것을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다. 즉 깨어 있음이 집중으로 이어지고, 집중이 통찰력으로 이어지며, 통찰력이 이해로 이어지고, 이해가 자비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운 느낌이 들면 평생 달아나기만 한다. 하지만 단지 모든 것을 멈추고 깊은 호흡을 한 후 우리 안에 있는 느낌을 감싸 안는 것만으로, 변화의 과정이 시작되고 두려움에 대처하는 우리의 능력이 확장된다. 이 수행은 사람마다 다른 반응을 이끌어 내는데, 나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것과 동일한 느낌을 체험했던 세 살짜리 아이와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만남이 있은 후 나는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이제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 그 방으로 돌아가도 될만큼 내 상태가 좋아졌던 것이다.

  그 방을 나올 때는 아버지가 무서운 괴물로 보였지만 다시 돌아갔을 때는 오직 아버지의 고통만 느겼졌다. 아버지의 감정은 너무나 격력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얼마나 두려운지 알 수 있었다. 당시 내가 아버지에게 느꼈던 감정은 자비심뿐이었다. 자비심만을 품고서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마디는 "아버지가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하는 게 가슴 아파요. 제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요?" 였다.

  내가 나 자신의 고통에 얽매여 있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볼 수 없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이성을 잃고서 나의 고통만 바라볼 뿐이었다. 만약 당시에 내가 격한 감정을 잘 보살피지 못했다면 나의 감정은 지극히 독선적으로 흘렀을 것이다. 나는 좋은 딸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며, 오직 어머니에게만 관심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을 것이다. 어머니를 잘 돌봐 드리기 위해서는 아버지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리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 안에 살고 있는 아버지가 비난과 비판에 반응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 내가 그렇게 했다면 아버지는 더 거세게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는 기분이 들어 어머니를 더욱 심하게 다그쳤을 것이다. 결국 내가 어떻게 막아 보려고 했던 바로 그런 상황을 초래했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수행을 해왔기에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또 그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아버지에 대한 비난을 멈췄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여전히 화의 감정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똑같은 말 ("아버지가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하는 게 가슴 아파요. 제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요?")을 했더라도 아버지는 내 목소리의 느낌, 얼굴 표정, 신체 언어를 통해 자신이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깨어 있는 말을 한다는 것은, 단지 그 상황에 적합한 말을 고르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나쁜 감정을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깊이 보기를 통해 내 안에 자리한 이해의 장에 도달할 때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나와 갈등 관계에 있는 상대방에까지 자비심이 우러난다. 내 마음 속에 자리한 고통이 변화하는 순간 나는 우리 두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리되면 내가 어떤 말을 고르느냐는 그리 중요치 않다. 상대방은 오직 사랑만을 느낀다. 사람들은 사랑받고 있을 때 그것을 알고, 사랑받고 있지 못할 때도 그것을 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발견한 게 하나 있다. 이 수행을 해도 격렬한 감정은 여전히 경험하지만 다루기 힘든 감정의 세기가 작아진다는 사실이다. 나는 "안녕, 화야! 나의 작은 친구! 네가 돌아왔구나."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바로 그 순간 감정의 격력함이 사라진다. 내 안의 상처받은 아이를 잘 돌봐 줄 때, 비록 고통의 느낌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아이와 나의 관계, 세상에 대한 나의 인식, 남들과의 관계에 대한 나의 인식은 변화했다. 깨어 있음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서 그날 왜 내가 그렇게 공격적으로 말을 하게 되었는지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내가 느낀 감정을 공감해줘야 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내 안의 상처받은 아이가 느낀 감정은 모른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나는 아내와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 안의 상처받고 화난 아이부터 먼저 달래줘야 했다. 내 안에 나쁜 감정이 생겼음을 인정하고, 그 감정부터 보살피고 내 안의 상처입은 아이부터 달래줘야 했다. 그리고 나를 질책하는 아내가 아니라 아내의 안에 있는 다섯살 아이를 볼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머리 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아내를 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을 때 대화를 시작했어야 했다.


내 안에는 아이가 있다.
쉽게 상처받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내 안에는... 나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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